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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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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신 말씀을 가지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 그런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들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믿음은 무엇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 그러면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러면서 계속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면서 나오는데,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이 단어가 스무 번 나오는데 문장 내용으로 보면 사람 한 사람마다 다 '믿음으로' 단어가 들어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믿음으로' 이 11장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믿음장의 제일 끝에 보면 어떤 말씀이 있는가 하니까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이 믿음으로 살아간 이 사람, 초대교회 때에 믿음으로 살아간 그 사람을 가리켜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이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인데, 그러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한 믿음 갖고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됩니까? 마찬가지로 오늘 이 시대에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 믿음을 가져야 돼요. 그래야 우리는 승리합니다. 그러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인데, 그러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을 때에 오늘 읽은 이 본문이 바로 그 답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돼요. 그게 진정한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고유한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그 삶, 그 삶의 발걸음이돼야 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우리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서 모든 상인들을 쫓아내시고 물건이 올려져 있는 모든 장사하는 상들을 뒤엎어 버리시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무슨 권위로 성전에 들어와 가지고 어제는 성전을 뒤엎어 버리고, 오늘은 또 와서 가르치느냐 이 말이거든. 그럴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반문하셨습니다. 직답을 하지 않고 "그러면 내가 묻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대답하라." 세례 요한은 죽었지만 모든 백성들이 그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시비 거는 저들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지혜롭게 피하신 거지요. 저들의 입을 꽉 다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침묵하신 그 의미의 메시지는 뭐냐 하니까 '나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권위를 받아서 행동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잖아요. 독생자로 오셨잖아요. 그 모든 권위를 가지고 지금 하고 있잖아요. 하나님의 성전의 주인 되신 주님이 청결하게 하시는데 장사하고 그러면 됩니까? 예수님의 모든 능력과 그 권위는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믿어야 돼요. 유대인들은 하나님 믿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늘 기도하는 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한 절을 음미해 보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신앙이란 뭐냐 하니까 내 권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내 권위와 체면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는 거예요. 오늘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하는 죄가 뭐냐니까, 특히 영적 지도자들이 범하는 죄가 있는데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겁니다. 그런 종류의 실수를 우리는 하지 말아야 되지요. 성령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떤 믿음으로 세상을 살았는가? 오늘 성경에 보니까 심한 고문을 받고 조롱과 채찍질, 결박과 옥에 갇히는 그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아도, 노예가 되고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불의 세력에 당해도, 사자들의 밥이 되어도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거나 도둑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우리의 그 실천 행동을 통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그 삶을 살아야 돼요. 초대교회는 핍박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렸는데 지금은 핍박 그런 시대가 아닌데도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게 없어요. 전부 다 자기가 다 취해요, 하나님이 없어요. 우리는 이 시대의 서밋 성도로서 진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됩니다. 이게 바로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이 믿음인 거예요. 그리고 두 번째가 뭐냐니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는 삶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거, 큰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포도원 소출 얼마를 달라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주인 되신 주님이 농부들에게 세를 줬는데, 여기에 농부라는 그 단어가 그냥 파머(Farmer)가 아니고 영어 성경에는 테넌트(Tenant)라 돼 있습니다. 그 테넌트가 뭐냐 하니까 세입자, 임차인, 소작인입니다. 옛날에 소작인 아시죠? 이런 세입자, 임차인, 소작인으로 이렇게 주인으로부터 땅을 받아 가지고 이렇게 농사를 짓는데 옛날에는 50%를 냈다니까요. 우리 옛날 소작을 보니까 땅 가진 사람이 50%를 가져가요. 좀 마음 좋은 사람은 60% 주고 40% 가지고 이러더라고요. 그런데 하나님은 얼마나 주인이 좋은지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종을 보낸 거예요. 그런데 이 농부들이 얼마나 악하냐면 종을 몹시 때리고 빈손으로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종을 보냈더니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욕도 퍼붓고 또 빈손으로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종을 보냈더니 이 종도 너무 상하게 해서 아예 쫓아버렸습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이 말하기를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낼 것이다. 그들이 그는 존대하지 않겠나?' 그런데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합니다. '이는 상속자니 죽이자. 그래서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그러면서 포도원 밖에 쫓아내어 죽여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이것은 물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대적하는 그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거죠. 예수님은 늘 중요한 것을 이 비유로 말씀하는데 이게 인간들의 그 깊은 곳에 있는 강팍한 마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인이 왜 포도원 소출 얼마를 요구할까요? 하나님을 믿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는 거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알고 실천하는데, 소출 얼마를 달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까 '네가 진정 내가 하나님이고 내가 주인이고 너희는 소작인인 줄 알고 있느냐? 네가 진정 하나님 말씀을 인정하고 정말로 실천하느냐?' 그것을 보는 거거든요. 포도원 주인이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죽여 버리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줍니다. 이게 이제 심판인데 여기에서 예수님은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포도원 소출은 소출 정도가 아니에요. 그 안에 엄청난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가 있는데 그 마음이 뭐냐? "너희들은 건축자들을 버리지 않았느냐?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찌함이냐?"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메시지는 십자가와 부활을 지금 말씀하고 있어요. 그 십자가와 부활을 유대인 땅에 보내서 이 일을 하고 계시는데 유대인들은 이 복음을 못 받는 거예요. 은혜를 모르고 감사도 없고 배은망덕한 이 악한 농부들로 말미암아 아들이 죽었지만 부활하셔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는데,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고 은혜를 모르고 감사도 없고 배은망덕하여 소출 얼마도 내지 않는 이런 자들을 향해서 완전히 심판하시는 겁니다. 돌 위에 떨어진다,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진다. 이 의미는 예수님을 거부하고 부딪히는 사람은 스스로 깨어지고 상처를 입게 된다는 의미예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하는 자는 결국 심판과 파멸을 자초하는데, 더 무서운 말씀은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가루가 되어 흩어집니다. 마지막 심판 때 머릿돌 되신 예수님이 심판의 주로 오실 때 거부한 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히 무너지고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겁니다. 이게 영원한 성경이잖아요. 이런 예수님 앞에서 영원한 상급을 얻는 것은 칭찬받는 거거든. 이런 심판을 받으면 이거는 영원한 실패 아닙니까? 지금 유대인들이 그 무서운 엄청난 짓을 지금 하고 있는데 자기들은 모르는 거예요. 그 후손들이 얼마나 고생할지를. 주님은 아시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울으시는 주님. 오늘 참 우리가 이 복음 안에 서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지 말로 형용할 수 없어요. 나 하나 복음에 서는데 나와 관계된 후대, 나와 관계된 모든 곳에 흑암이 무너져 버립니다. 이게 얼마나 귀한지 몰라요. 지금은 예수님을 거부하면 깨어짐을 경험하지만 마지막 날에는 완전한 멸망으로 이어지는 강한 경고인데, 오늘 우리는 참 복음 받은 것을 감사하고 이 소출 얼마라고 하는 그 단어 속에 하나님이 숨겨두신 이 복음의 비밀을 진짜 깨닫고 우리가 살아간다면 이 복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 문장 다 포함되어 있어요. 복음의 사람, 복음의 사람 안에는 전부 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든 것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저 사람 참 복음의 사람이야." 그 내용 속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지요. 한마디로 말하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다 담겨져 가지고 복음의 시야, 그리스도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면 다 보이잖아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이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르쳐 말씀했다는 걸 알고 뭐합니까? 회개 안 해요. 잡고자 하나 백성을 두려워하니까 잡지 못하고 어쩌든지 어떻게 허물을 잡고 잡으려고 하는 그것도 보통이 아니잖아요. 여러분들 이렇게 되고 싶어 하겠습니까? 흑암의 땅에 묶여 버리면, 사단의 올무에 걸려 놓으면 자기는 옳다고 하는 것이 결국 말씀을 거스르고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틀린 것은 안 해요, 옳은 일을 해요. 옳은 일을 하는데 어디까지 갔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는 그런 자리까지 갔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장담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죄인이잖아요. 아무리 의롭고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우리는 죄인이에요. 예수님만 유일하게 의인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다 이 말은 뭐냐니까 언제든지 넘어질 가능성이 많아요. 사단이 공격하면 나도 모르게 넘어지는 게 인간이거든. 그래서 십자가 붙잡고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오늘도 내게 성령 충만케 하옵소서." 오늘 말씀 들은 거 있잖아요, 사도행전 갈보리에서 로마까지 쫙 이게 우리의 삶의 어떤 패턴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부활 소망으로 사는 삶입니다. 부활 소망.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이 와 가지고 예수님께 이야기합니다. "칠 형제가 있는데 마지가 아내를 취했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일곱이 다 그 아내를 취했는데 부활 때에 그중에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이 말이 됩니까? 부활도 안 믿는 이것들이 부활을 가지고 지금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겁니다. 말 안 되는 것도 그 악한 일을 위해서는 다 활용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간단하게 답하셨어요.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어.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고 천사와 같음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그러면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예수님은 항상 이렇게 둘러서 정답을 탁 이야기하신 거예요. 참 지혜가, 현장에서 우리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특징이 이 세상의 두려움과 집착, 이권에서 벗어나 가지고 믿음으로 거룩하게 담대하게 살잖아요. 모세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그냥 우리가 볼 때는 이스라엘 지도자로 살았지만 히브리서에서 말씀하기를 그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게 모세의 인생입니다. 성경에 보니까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어디서 상 줍니까? 하늘나라 믿었다는 거예요. 이 세상 지나면 하늘나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신데 하늘나라 계시니까 하나님께로 간다고 하는 그 본향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백성을 위해서 고난받는 것을 애굽의 궁중 생활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기쁨으로 감당한 겁니다. 이게 오늘 우리의 부활의 신앙입니다. 여러분들 부활의 이 소망 회복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게 중요한 거죠. 모든 것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다윗인데 다윗이 성령 충만해서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일찍이 오실 그리스도를 뭐라 그랬냐, '주'라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그러니까 맞거든요, 그냥 말을 못 하는 거예요. 그러면 눈치가 빠르면 '아, 이분이 우리가 그렇게 존경하던 다윗이 예언한 그 주인공 메시아구나' 하고 무릎 꿇고 회개해야 되는데 절대로 회개 못 해요. "이 무슨 건방지게 존경하는 다윗을 언급하다니" 그러면서 더 미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 시대는 경건한 자는 다 복음으로 경건해지는데 악한 자는 더 강팍해져요. 이런 올무에 안 걸리기를 기도해야 됩니다. 나도 모르게 이런 올무에 걸리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이 되거든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며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걸어갈 길인데, 사도행전 5장 42절에 보니까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거치지 아니하니라." 한 주간 동안 무슨 이야기합니까? 사도행전 속에 들어가서 집에 있으나 어디에 있으나 내 입에서 뭐가 나와야 됩니까?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이게 성공자입니다. 내 스스로 "예수는 그리스도" 이렇게 고백하다 보면 이게 내 안에 복음화되고, 이제 이 복음 받을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예수는 그리스도인데" 하면서 때로는 설명도 하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답을 줍니다. 승리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주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걸어간 길을 우리가 걸어갈 길인 줄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 속에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반드시 깨닫고 걸어가야 할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비유하신 그 모든 깊은 곳에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들어 있고,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고 갈급한 자는 그 말씀이 양식이 되지만 흑암에 잡혀 버리면 다 올무가 되기에, 우리의 삶 속에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지는 진정한 복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시고,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며 한 영혼을 살리는 이 믿음의 중심을 가지고 현장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밝히 증거하는 이 시대의 믿음의 주역,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주께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옵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50921 주일오전예배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 (눅 20:9-26) 서밋선교교회 / 설교 박한식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