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에서 소망으로. 네, 그런 제목입니다.
이제 40일 간의 폭우가 쳤습니다. 그리고 150일간 세상을 뒤엎던 그 심판의 홍수가 이제는 서서히 빠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성경 1절을 보면, 1절에 여호와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셨다. 하나님이 기억하셨다. 이 말 속에는 그냥 망각의 은혜로 잊어버렸다가 다시 기억한 것이 아니고, 이제 새롭게 시작한다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구원을 새롭게 작정하시고 행동을 개시하셨습니다.
1절 후반에 보니까 그를 위해 구원을 베풀기로 작정하시고 땅에 바람을 보내시니 물이 줄어들었다. 여기 바람으로 되어 있는 그 히브리어 '루아흐'라는 말은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땅이 공허하고 혼돈한 거기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셨다 할 때의 바람입니다. 수면에 운행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어떤 일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있듯이, 하나님이 바람을 불게 하심으로 인해서 150일간 창일했던, 한 번도 줄지 않았던 이 땅의 물이 바람을 불게 하심으로 이제 점점 줄어들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하시는 거지요.
세상을 심판하신 그 가장 높은 아라랏산에서 7m 더 높이 물로 가득했던 거기에 물이 줄어들지 않다가, 150일 동안에 드디어 하나님이 다 시작을 하시는 거예요. 바람을 부는데, 아마 제 생각에는 강풍이 불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나님이 바람을 몰아서 계속 끊임없이 부는 거예요. 40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와서 홍수가 났던 그 어마어마한 심판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드디어 이렇게 바람을 불게 하시니까 물이 점점 줄어들어 갑니다. 왜 이런 일을 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시고 그 모든 생명들을 기억하셔서, 이제는 새롭게 재창조의 사역을 진행하시기 위한 것이지요.
6절에 보니까요. 40일 후에 노아는 자신이 만든 방주의 창문을 열었다. 노아는 창문을 열고 이제 세상을 보기 위해서 까마귀를 보낸 거죠. 그런데 까마귀를 보낼 때는 메시지가 있잖아요, 세상이 어떠한지를. 그래서 메시지를 주고 까마귀를 보냈는데, 이 까마귀는 임무를 수행했으면 돌아와야 되는데 계속 왔다 갔다만 합니다. 목적 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까마귀는 불신자를 의미하거든요. 메시지가 없다 보니까 계속 방황하고, 왔다 갔다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자기 멋대로 살고 그렇게 사는 인생이 참 많습니다.
불신자뿐만 아니라 불신자들도 아주 똑똑한 사람들은 메시지가 있어요. 철학이 있어서 방황을 하더라도 시간을 그렇게 허비하지 않습니다. 의미가 있고 방향과 철학이 서 있어서 무슨 일이든 하거든요. 그래서 집을 나간 탕자보다 집에 있으면서 방황하는 탕자가 더 무섭습니다. 자기가 계속 무너져 있는 거예요. 감사할 일이 참 많은데도 불구하고 집에 있는 탕자는 계속 불만이 많아요.
오늘 하나님의 자녀는 메시지가 있어야 되는데, 그리하여 비둘기를 내보냈거든요. 비둘기는 한번 싹 둘러보고 앉을 곳이 없어서 바로 돌아왔어요. 그 말은 뭐죠? 아, 물이 완전히 감하지 않았구나. 아직 땅이 안 보이는구나. 바람은 계속 불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보냈더니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가져왔어요. 그 말은 뭐냐? 땅이 드디어 나왔고 이제는 식물이 자라는구나. 일주일 후에 다시 보냈더니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 말은 이제 안주할 수 있구나, 땅이 말라가는구나 그걸 깨달은 거죠.
비둘기는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하거든요. 성령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하잖아요. 하나님의 자녀가 독특하고 뚜렷한 것이 뭘까요? 메시지를 받고, 이 메시지를 실천하고, 이 메시지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입니다. 메시지가 있는 사람, 메시지를 받고 그 메시지 따라 살아가는 뚜렷한 분별력 있는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잖아요. 사람들이 보면 '아, 방황하는구나' 하고 다 압니다. 그런데 메시지가 있는 사람은 사람들이 딱 알아봅니다. '아, 메시지가 있네.' 그 메시지가 뭐냐, 그 사람이 추구하고 방향으로 가는 게 뭘까를 보면서 결국 무엇을 봐야 합니까? "예수는 그리스도." 이게 딱 나와야 됩니다.
노아를 보세요. 노아가 얼마나 메시지가 정확한지요. 이제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땅이 말랐기 때문에 자신이 판단해서 창문을 열고 문을 열어 "야, 나갑시다. 이제는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다 확인했거든요. 까마귀도 보냈고, 비둘기도 세 번이나 보냈습니다. 3주 이상 기다렸잖아요. 거의 한 달을 기다리면서 다 확인을 했다니까요. 다 확인을 했으면 그 판단에 의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행동 개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까지. 15절에 보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하면, "이제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와라." 하나님의 말씀이 방주에서 나오라고 하실 때까지 기다린 거예요. 그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그 말씀에 의해 이제 노아와 식구들, 모든 짐승들을 싹 이끌고 세상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철저히 지켜야 될 삶의 철학이고 정체성이고 분별력입니다. 아, 하나님 말씀 따라 살면 사람이 참 지혜로울 수밖에 없어요. 메시지가 내 안에 있고 이 메시지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놀라운 은혜와 지혜를 주시는 것이죠.
하나님이 그 시대에 노아를 보시면서 의인이라고 칭찬하신 그 이유가 뭐냐면, 그 셋의 후손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왜 하필 노아일까요? 할아버지 무두셀라의 발자취, 믿음의 발자취를 다 듣고 메시지화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방주를 짓고 끝날 때까지 늘 말씀으로 도와주었고 힘을 주었어요. 홍수가 시작되는 그해에 무두셀라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가고, 이 메시지를 가지고 노아는 방주를 이렇게 지었고 말씀 따라 움직인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를 볼 때 너무 뿌듯하신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지 안 따르는지 그 중심을 하나님은 아신다니까요.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 따라가려고 그러고, 말씀을 즐겁게 지키고, 말씀에 의해 움직이는 그 한 사람을 의인이라 부릅니다.
20절에 보니까 노아가 여호와를 위해 제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들과 정결한 새들 가운데 몇을 잡아 그 제단 위에 번제로 드렸다. 노아가 세상에 나와서 가장 첫 번째로 한 것이 뭐냐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게 이제 노아의 완전한 정체성이지요. 그게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게 성도의 특징 아닙니까? 성도들은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살면서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께 우리 예배드립시다" 하는 일이 많기를 바랍니다. 틈틈이 예배드릴 일이 많아야 돼요. "목사님, 예배 좀 드려 주세요" 하고 초청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다 준비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기점을 아시기 때문에 '얘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 내게 영광 돌리겠다'라고 판단이 되면 하나님이 좋은 일을 일으키신다니까요.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셨어요.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 그 내용을 보면 희생제사잖아요. 번제를 드렸는데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는 그 예배를 드렸단 말이죠. 그 말은 우리가 늘 듣는 희생제사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구약 시대나 지금이나 예배의 주인공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주인공이 돼야 합니다.
피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야 합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보니까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노아가 의인 된 이유는 바로 그 중심 속에 피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비밀을 몰라요. 그런데 노아는 그 피의 비밀을 알기 때문에 피의 주인공을 바라본 거예요. 의의 상속자라고 히브리서에서도 말씀하고 있잖아요.
진짜 우리의 깊은 마음속에 정말 이 피의 비밀을 알고 믿고 있느냐, 하나님이 아십니다.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는 믿음이 뭐냐 하면 이 피의 비밀을 알고, 그 피의 비밀을 믿고, 그 피 공로를 의지하고, 그 피를 힘입어서 하루를 살아가는 그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보니까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원죄도 그리스도의 피로 사함 받고, 우리의 모든 삶 속에 실수한 모든 죄도 그리스도의 피로 사함 받기 때문에 피로 씻어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의 피로 사함 받기를 기도하고, 하루가 끝나면 돌아와서 예수의 피로 또 씻고 그래야 우리가 정결함이 유지되잖아요.
에베소서 5장 2절에 보니까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하나님은 노아의 그 향기를 받으셨듯이, 우리가 정성을 가득 담으면 하나님이 그 제물을 받으신다는 것은 희생제사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그 향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거죠. 그래서 예배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향기가 하나님께 들려질 정도로 이 피 공로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가득 차야만이 흑암이 꺾여 나갑니다. 이 믿음이 강해야 됩니다. 강한 것 중에 이것밖에 없어요.
우리 성도들의 깊은 중심 속에는 내가 아무리 애쓰고 헌신해도 하나님이 그냥 받으시는 거 아닙니다. 사람은 좋아할지 몰라도 인간이 아무리 애써봤자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어디로 중심을 모아야 되느냐? "내가 살길은 예수밖에 없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의 진한 향기가 나를 통하여, 우리 교회를 통하여, 내 삶의 모든 영역을 통하여 진동하도록 그분을 의지한다는 거죠. 그 믿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믿음 앞에 흑암이 확 무너집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래서 예배의 중요한 이 부분을 여러분들이 깨달으셔야 합니다. 오늘 노아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 시대는 뭐가 희미하냐? 그리스도의 피가 희미해져 버렸어요. 그래서 세상의 물결, 죄악의 물결을 못 이깁니다. 이 피의 비밀을 진짜 아는 한 사람이 현장에 들어가서 "주여, 오늘도 이 현장에 나를 통하여 기도하오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이 이곳에 덮어질 수 있도록 주여 역사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고 현장에 들어가면 흑암이 분명히 깨어지는 걸 보게 됩니다.
보니까 하나님 마음에 너무 쏙 드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그 깊은 중심 속에 하나님이 그토록 그토록 기대하고 소원하는 소원이 들어 있는데, 그 소원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보혈을 향한 믿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 피 공로를 의지하는 믿음이 가득한 거예요. "하나님, 나는 부족합니다. 오늘 내가 있는 현장에 주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역사해 주옵소서" 하고 그 믿음으로 가득 찬 한 사람이 현장에서 일을 하잖아요? 하나님이 거기에 흑암을 꺾어 버리십니다. 기적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이런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주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의 피 제사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기를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처럼 모든 생물을 다시는 멸하지 아니하리라" 약속하신 주님, 오늘 우리 재단에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이 성취될 수 있도록 하나님 축복하여 주옵소서.
우리 모든 성도의 깊은 중심 속에 정말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피의 비밀이 넘치도록 하나님 역사하여 주옵소서. 내 주위의 흑암이 꺾어질 만큼 피의 비밀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시며, 우리의 모든 나로 말미암아 출발한 불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앞에 다 무너지고 떨어져 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자연의 섭리를 회복하신 주님, 오늘 이 시대에 너무 이기주의가 팽배하다 보니까 자연이 많이 파괴되지만, 그러나 믿음의 한 사람을 통하여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는 주의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심히 기쁘시게 해드리는 믿음의 주역 될 수 있도록 주께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